경험으로부터의 격리, 카나 여동생
- 게임/리뷰평점
- 2015. 12. 18.
제목을 무겁게 했습니다. 간단히 소개하려는 게임이 워낙 무겁다보니. 첨부한 그림은 카나: 여동생이라는 게임의 타이틀 화면입니다.
키미노조(네가 바라는 영원)으로 인해 제가 모르던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게된 저는 미국에서 당장 구할 수 있는 비슷한 계열의 게임을 찾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영문화된 일본 게임 중 카나: 여동생이 수작의 하나라는 정보를 입수했죠. 그리고 주저함없이 샀습니다.
카나: 여동생은 미소녀 연애 게임의 범주에 들어가기는 힘듭니다. 게임에 미소녀가 나오면 미소녀 게임이라지만 연애가 목적이 아니라 병약한 여동생의 죽음을 하나 하나 짚어가는 게임이기 때문이죠.
이 게임은 여러 문제점이 있습니다. 키미노조와 비교했을 때 (아니 키미노조도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지만서두)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빠가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하는 것을 본 여동생이 다음 장면에서 "오빠 여자친구 있어?" 라고 물어본다든지 하는 건데요. 이건 게임의 진행상 선택에 따라 이미 주어진 몇 개의 상황이 재활용되기 때문입니다. 분기에 따라 새로운 그림과 대사를 그려넣었어야 하지만, 그냥 목격하지 않은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장면을 다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한정된 그림과 대사로 여러 스토리와 엔딩을 만들어내려다보니 나타난 문제겠죠. 수작 중의 수작이라 불리우는 키미노조에서도 왜 주인공들이 그렇게 까지 좋아하게 혹은 미워하게 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정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걸 떠올리면 어쩔 수 없는 한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서 모든 이들에게 수긍이 가는 충분하고 필연적인 이유와 사건들 때문에 한 사람의 행보가 정해지는 건 아니죠. 그래서 한 사람의 궤적은 다른 사람에겐 넌센스, 아집, 답답함으로 보이는 것이고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설득력있게 보이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키미노조가 해피엔딩임에도 가슴에 퍽 하고 때리는 듯한 아픔을 주는 스토리임에 반해, 카나: 여동생은 가슴 아픈 여운을 느낄 사이도 없이 눈물을 흘리게 만듭니다. 네. 눈물이 흐르더군요. 여동생이 죽을 거라는 거, 분명히 죽기 전에 무언가 애절한 말을 남길 거라는 거, 당연히 이 게임을 병약하고 순수하고 의존적이고 착한 여자 주인공을 내세운 최루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나더군요.
한 세기 전과 비교했을 때 놀랄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여러 매체들, 소설, 영화, 만화, 텔레비젼 덕택에 우리들 모두는 참으로 많은 지식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알쏭달쏭한 철학책에서 시작해서 기발한 공상과학 소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리와 설명과 이론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논리나 이론이 아니라 무엇인가 '새로운' 입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알듯 모를 듯 한 문장이나 표현을 읽으면 그것을 해독하려 노력했고 최신의 학자와 주장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실망도 많이 했지요. 얼핏 보면 새로운 것 같은데 또 비슷비슷한 주제와 방식이 반복되는 것이 많았으니까요. 새로운 것이란 너무 드물었습니다. 한 꺼풀 벗겨보면 19세기의 학자나 21세기의 학자나 크게 다른 것도 없으니까요.
점점 둔감해져갔지요. 슬슬 요령도 터득해서 쓱- 훒어보고 논의의 구조를 파악하는 속도도 빨라졌고 그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시큰둥해져 있는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뻔한 논의에 대한 뻔한 비판을 하는 것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제 성급한 결론을 떠들어대는 시간도 줄어들었다는 점이었겠지요.
그런데, 카나: 여동생은 흔해도 너무나 흔해빠진 설정인데다 설득력도 떨어지고 결론도 빤한데 너무나도 강력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앞서도 소개했지만, 이 게임은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구조도 단순해서 죽어가는 여동생과 그녀를 아끼는 오빠 두 사람 이외에 다른 주인공들은 그저 보조 캐릭터들이죠. 문득, 제가 '죽음'으로부터 격리되어 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론서나 책 속에서의 죽음은 여러 의미를 지닙니다. 일종의 은유로 인간 개념의 죽음이니, 남성중심주의의 죽음, 죽어야 살고 사는 것이 죽음과 다르지 않은 역설 등등의 논의도 많이 접했습니다만, 전 한번도 죽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더군요. 하다못해 집에서 기르던 동물이 죽은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현대사회에서 죽음을 경험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누군가 심하게 아프면 병원으로 가게 되고 죽음이 다가오는 과정을 보는 것이 의사나 간호사들의 일상이 되었죠. 실상, 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삶의 절대적인 조건인 죽음은 점점 경험의 영역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병원이라는 공장의 <공정>이 되어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젠, 누군가의 죽음을 들여다보고 소생을 희망하고, 운명에 안타까와 하기 힘들어 졌습니다. 그렇게 죽음으로 부터 격리되어왔던 저는 단지 3시간 남짓한 게임의 세계를 만나 넉다운 되어버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아니 그런 질문 자체를 던진 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을 거쳐오면서 제가 배운 것은, 소득없는 질문과 영양가 있는 질문을 나누고 정답을 확정할 수 없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었나도 싶고.
왜 그리도 새롭고 특이하고 다른 메시지나 방식을 찾아다녔던 걸까요? 새로운 이론과 신선한 접근방식이란 저를 무엇으로부터 격리시켜 왔던 것일까요? 흐흠... (출처: 토끼와 꼬붑의 일기장, 2005)
리뷰평점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