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바라는 영원 - 키미노조

그림은 <네가 바라는 영원> 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의 여주인공입니다. 본래는 일본의 비쥬얼 노블(흠, 조금 위험한? 장르)이 원작인 작품이죠. 재밌는 별명이 <네가 지르는 염장>이라지요?


대충의 줄거리는 삼각관계입니다. 고교3학년 시절 사귀게된 여자친구가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어 3년 동안 병원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그 여자친구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여자와 사귀던 주인공. (역시나) 본래 여자친구가 깨어나면서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주인공의 우유부단한 행태가 보는 이들의 염장을 지른다고 하더군요.


그대가 바라는 영원 키미노조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줄거리 요약은 '죄악'입니다. 이 요약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애니에 대해선 별로 전하는 것이 없는 줄거리죠. 나이 서른이 훌쩍 넘은 제가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고 30분 가까이 멍하니 아린 가슴을 안고 아무 일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위의 줄거리를 읽고 가슴이 아프다고 느끼실 분이 누구 있겠습니까?


공부를 하면서, 제가 하고 있는 일 아니 하고자 하는 일 역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무엇인가를 쓰는 것입니다. 수많은 방법이 있고 분야가 있으며 주제가 있을 수 있겠죠. 그 글 중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3년 동안 저의 마음을 움직인 책이나 글을 몇 개나 읽었을까요?


위의 애니메이션의 제목, <그대가 바라는 영원>이란 여러 울림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비극적인 사건 이후 고통받는 모든 주인공들 뿐 아니라 그 이야기를 보고 읽고 있는 모두가 바라는 것은, '여주인공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이겠죠. 이렇게 가정하면 <영원>은 '편안한 삶'입니다.


하지만 다른 '선'이 있습니다. 이 애니는 '선택의 연속'을 보여줍니다. 모든 주인공은 여러 가능성 중의 하나를 선택합니다. 그 선택은 점심식사 메뉴를 고르는 식의 종류가 아니라, 그 선택의 결과로 다른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어떤 사람을 아프게 하고, 자신의 일부를 잃게 되는 것이죠. 이 애니의 남자 주인공은 어떤 선택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어떤 곳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것도 상처입히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만, 그 주저함 역시 또 하나의 선택이기에 그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최악이죠. 결국 그는 하나를 선택하죠. <영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영원을 바란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과 같고, 최악의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애니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병상에서 깨어난 여주인공의 마지막 대사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대사는 한 캐릭터의 것이 아니라 몇 백분에 걸친 애니메이션 내의 모든 인물과 사건들이 그 한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그 대사가 뭐냐고요? "안녕"이었죠. 자신이 소유한 것, 익숙한 것, 편안한 것과의 이별. '희생' 의 메시지. 희생이라는 선택. 이 애니는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반복해 전해주던 메시지 즉 영원은 희생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반복합니다.


그대가 바라는 영원 키미노조 타이틀


요령있게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는 이 애니를 요약 소개하면서 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전하려는 '영원'이란 잃어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즉 등가교환의 원칙이 지배하는(강철의 연금술사의 메시지군요) 이 세계에서, 희생을 택함으로써 다시 얻게되는 '순수 가능성' 그 자체 이기 때문입니다. 등가교환이 세계의 원칙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만일 선택을 통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같다는 사실을 안다면 경제의 원칙에 기대서는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멈춤을 의미하기 때문에 등가교환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선택들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더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오인된 무엇인가를 좇아갑니다. 그 선을 따르는 한, 과거는 '자원'이거나 '잔존'이죠. 그러나 때때로 선택은 과거를 송두리채 안고 경계를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행복했던, 선택 이전의, 편안한 삶은 영원이 됩니다.


<그대가 바라는 영원>은 제가 끄적거린 이 모든 것을 품고 있습니다. 놀라운 작품. 수많은 선분과 해석의 가능성들... 도대체 이런 비슷한 것을 쓸 수 있는가. 아니 쓰기를 희망할 수 있는 건가. <토끼와 꼬붑의 일기장,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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